자신을 지워내고 자연을 품다
현대 건축의 흐름 속에서 대다수의 스타 건축가들은 건물의 형태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애쓴다.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나 육중한 노출 콘크리트, 혹은 화려한 티타늄 곡선으로 도시의 풍경을 압도하는 랜드마크를 짓는 것이 이들의 일반적인 목표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비적이고 자기주장 강한 건축의 대척점에는, 건물의 존재감을 한없이 투명하게 지워버리고 주변 자연과 사람들의 움직임만을 오롯이 남기려 하는 고요한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Kazuyo Sejima)와 니시자와 류에(Ryue Nishizawa)가 결성한 건축가 그룹 '사나(SANAA)'가 그 주인공이다. 2010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이들은, 얇은 유리와 가느다란 철골을 이용해 건축물의 물리적인 경계를 극한까지 얇게 깎아낸다. 이른바 '지워지는 건축(Erasing Architecture)'이라 불리는 이들의 철학은, 건물이 대지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자연의 풍경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녹아내리는 얇은 투명 망토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건축물이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활동과 숲의 그림자가 주인공이 되도록, 극단적인 비움과 투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앞뒤가 없는 원형의 광장,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세지마 가즈요와 SANAA의 이름이 세계 건축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4년 일본 이시카와현에 지어진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Kanazawa)'이다. 전통적인 미술관은 거대한 정문을 통해 관람객을 압도하며 엄숙하고 일방적인 동선으로 이끄는 반면, SANAA는 지름 112미터의 거대한 둥근 원반 형태를 대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 얇고 투명한 원형 건물에는 정해진 '정문'이나 '뒷문'의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건물의 360도 외벽 전체가 프레임이 거의 보이지 않는 맑고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여 있어,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든 시민들이 공원을 산책하듯 자유롭게 미술관 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다. 미술관 내부의 전시실들 역시 획일적인 복도로 꽉 막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원 위에 크고 작은 네모난 상자들이 불규칙하게 흩뿌려진 것처럼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숲속을 산책하듯 유리벽 사이를 거닐며 자신이 원하는 순서대로 공간을 탐험한다. 투명한 외벽 덕분에 바깥을 걷는 사람들은 내부의 전시 작품을 볼 수 있고, 내부의 관람객은 바깥 공원의 계절 변화와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액자 속 그림처럼 감상하게 된다. 미술관 건물 자체가 스스로의 형태를 과시하는 대신, 사람과 사람, 예술과 자연의 일상을 엮어주는 투명한 광장이자 매개체로 완벽히 치환된 것이다.
인공의 언덕을 빚어내다, 롤렉스 러닝 센터
지워지는 건축의 유연함은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학교(EPFL) 캠퍼스에 지어진 '롤렉스 러닝 센터(Rolex Learning Center)'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유체역학적인 형태로 진화했다. 대학의 도서관이자 학생 회관, 연구실 역할을 하는 이 거대한 복합 공간에는 놀랍게도 공간을 층으로 나누는 '계단'이나 시야를 가로막는 '내부 벽'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축구장 두 개 크기에 달하는 건물 전체가 꿀렁이는 하나의 거대한 콘크리트 판(Slab)으로 이루어져 있어, 1층과 2층이라는 물리적 단절 없이 마치 자연 속의 부드러운 언덕과 계곡처럼 끝없이 연속되는 하나의 단일 공간(One-room)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을 밖에서 바라보면, 얇고 하얀 지붕과 바닥 판이 마치 호수의 잔물결처럼 부드럽게 굽이치며 대지 위에 공중 부양하듯 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은 가파른 벽이나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대신, 굽이치는 바닥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도서관, 카페, 열람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SANAA는 콘크리트라는 무겁고 인공적인 재료를 극도로 얇고 정밀하게 계산하여 빚어냄으로써, 스위스 알프스의 부드러운 구릉지를 완벽한 인공적인 언덕으로 복제해 냈다. 보이지 않는 아치 구조가 건물의 하중을 분산시키며 기둥의 존재를 소거한 이 압도적인 유연성 속에서, 건축은 완고한 사각형의 감옥을 벗어나 수만 명의 학생이 물 흐르듯 교류하는 살아 숨 쉬는 인공 자연으로 거듭났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강물, 그레이스 팜스
미국 코네티컷주의 광활한 숲과 언덕 위에 지어진 '그레이스 팜스(Grace Farms)'의 강 건축물(The River)은 SANAA가 대지와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극도로 섬세하고 겸손한지를 보여주는 절정의 무대다. 종교 단체의 다목적 커뮤니티 센터로 기획된 이 건축물은, 건물을 짓기 위해 숲의 나무를 무분별하게 베어내거나 흙을 깎아 평평한 대지를 만드는 폭력적인 토목 공사를 철저히 거부했다. 대신 기존 지형의 굽이치는 굴곡과 언덕의 경사를 그대로 살린 채,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숲속을 굽이굽이 흘러가듯 긴 곡선의 목조 지붕을 대지 위에 살포시 얹어 놓았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건물의 뼈대(기둥)들은 숲의 나무 기둥만큼이나 가늘게 설계되었고, 건물의 외벽은 프레임이 보이지 않는 특수 곡면 유리로만 채워져 있다. 멀리서 보면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지붕만이 숲 사이로 뱀처럼 굽이칠 뿐, 건물의 형태 자체는 숲의 울창한 풍경 속에 완벽하게 은폐되어 버린다. 이 투명한 강물 같은 건축물 안에서 사람들은 차를 마시고, 강연을 듣고, 기도를 올리며, 시야를 가리는 어떤 인공적인 장애물 없이 360도로 펼쳐진 사계절의 대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
약하고 투명한 것들이 지닌 가장 강인한 힘
서양의 고전 건축이 거대한 돌덩어리를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강력한 남성적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세지마 가즈요의 건축은 극도로 얇고 투명한 표피를 통해 자연과 인간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여성적이고 포용적인 공간의 혁명이다. 두껍고 무거운 벽돌이나 화려한 금속 장식 없이도, 가장 얇은 유리와 가녀린 곡선만으로 인류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자유롭게 엮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숭고한 침묵의 미학이다. 자신을 한없이 얇게 깎아내고 지워버림으로써 오히려 주변의 대지와 그곳에 머무는 사람을 가장 눈부시게 돋보이게 만드는 '지워지는 건축'. 세지마 가즈요와 SANAA가 빚어내는 이 연약하고 투명한 곡선들은, 시각적 폭력에 가까운 형태 과시와 자본주의적 스펙터클에 함몰되어 가는 현대 건축계에 '비움과 스며듦'이라는 가장 강인하고 깊은 철학적 파문을 조용히 던지고 있다.
※ 참고자료 출처:
-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 평론 (2010년 SANAA 수상 사유)
- 롤렉스 러닝 센터 및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건축 설계 개요 (SANAA 프로젝트 아카이브)
- 그레이스 팜스 커뮤니티 센터 공식 소개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