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혁명, 파사주의 탄생
산업혁명 이전의 상업 공간은 비좁은 골목길과 천막을 친 야외 시장이 전부였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장을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고, 도시는 질척거리는 진흙과 마차로 인한 오물로 가득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프랑스 파리에서 '파사주(Passage)'라는 혁명적인 상업 공간이 등장하며 도시의 풍경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파사주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 위를 철골과 유리 지붕으로 덮은 최초의 실내 아케이드였다. 마차의 위협과 오물을 피해, 사람들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안전하고 쾌적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자연광 아래로 화려한 쇼윈도와 카페가 늘어선 파사주는 당대 파리지앵들에게 환상적인 산책로였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무목적적으로 도시를 거니는 '만보객(Flâneur)'의 무대로 파사주를 주목했듯, 상업 공간이 단순히 생필품을 사는 곳을 넘어 도시의 문화를 소비하는 세련된 산책의 공간으로 진화한 첫걸음이었다.

거대한 스펙터클의 무대, 백화점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팽창과 대량 생산 체제는 좁은 파사주를 무너뜨리고 더 거대한 소비의 성을 요구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Department Store)인 파리의 '봉 마르셰(Le Bon Marché)'다. 파사주가 소규모 개인 상점들의 집합체였다면, 백화점은 거대한 단일 자본이 상품의 진열과 가격을 통제하는 거대한 소비의 궁전이었다. 건축가들은 발달한 철골 구조를 활용해 건물 중앙에 거대한 중정(Atrium)을 뚫고 웅장한 유리 돔을 올렸다. 화려한 장식과 대형 계단,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마치 오페라 극장과 같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연출했다.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묘사되었듯,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인 이 공간은 당시 여성들을 가정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공적인 도시 공간으로 이끌어낸 사회적 해방구이기도 했다. 백화점의 거대한 홀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소비라는 행위 자체를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적 특권으로 포장하는 정교한 심리적 무대 장치로 기능했다.

외부와 단절된 소비의 요새, 쇼핑몰
20세기 중반 미국으로 무대를 옮기며 상업 건축은 또 한 번의 거대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자동차 중심의 교외화(Suburbanization) 현상이 심화하면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빅터 그루엔(Victor Gruen)은 1956년 최초의 실내형 교외 쇼핑몰인 '사우스데일 센터(Southdale Center)'를 설계했다. 파리의 백화점이 도시 가로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루엔의 쇼핑몰은 외부의 자연이나 거리와 완전히 단절된 거대한 '상자'였다. 창문도, 시계도 없는 완벽한 인공 공조 시스템(에어컨) 속에서 사람들은 계절과 시간을 잊은 채 소비에 몰두했다. 외부는 황량하고 거대한 아스팔트 주차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내부는 인공 조명과 분수, 식물들로 꾸며진 완벽하게 통제된 인공 낙원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처럼 사람들의 시공간 감각을 마비시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이 기법은 훗날 '그루엔 효과(Gruen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로 명명되었다.
현대의 체험형 메가몰과 공간의 심리학
오늘날의 상업 건축은 단순히 물건을 쌓아두는 상자를 넘어섰다.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쇼핑의 위협에 맞서, 오프라인 상업 공간은 이제 '체험'을 파는 메가몰(Mega Mall)로 진화했다. 과거 그루엔 방식의 답답한 무창(Windowless) 구조에서 벗어나, 거대한 유리 천장으로 자연광을 끌어들이고 실내에 거대한 숲과 인공 폭포를 조성하는 등 '자연의 모방'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의 스타필드나 더현대 서울처럼, 현대의 메가몰들은 방문객이 돈을 쓰지 않고 걷기만 해도 즐거운 테마파크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 유려한 곡선의 동선과 화려한 실내 조경의 이면에는, 고객을 더 오래 머물게 하여 결국 소비로 유도하려는 고도의 상업적 계산이 치밀하게 깔려 있다.
욕망을 조종하는 건축적 프레임에 대한 단상
필자가 이러한 거대한 상업 공간 한가운데 섰을 때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자본주의 건축의 압도적인 위력이다. 과거 중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고딕 성당의 웅장한 늑재 볼트와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서 압도적인 종교적 경외감을 느꼈다면, 현대인들은 명품 브랜드의 거대한 파사드와 실내 폭포가 쏟아지는 쇼핑몰의 아트리움 아래서 그와 비슷한 맹목적인 동경과 물신주의를 체험한다. 과거 건축의 최고 정점이 신을 찬양하거나 권력을 과시하는 것에 바쳐졌다면,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건축물은 단연 상업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떻게 지갑을 여는지는, 사실 건축가와 거대 자본이 치밀하게 설계한 콘크리트와 유리의 프레임 안에서 철저히 유도되고 통제된 결과일지 모른다. 상업 건축의 진화사는 곧 인간의 소비 욕망을 가장 효율적으로 자극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발전해 온 '공간의 심리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