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태보다 프로그램을 우선시한 아방가르드
현대 건축계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사상가를 꼽으라면 단연 네덜란드 출신의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거론된다. 앞서 다룬 런던의 급진적인 건축 학교 'AA스쿨' 출신인 그는, 건물의 외관이나 미학적인 '형태(Form)'에 집착하던 전통 건축의 문법을 가차 없이 해체했다. 콜하스에게 건축이란 겉보기에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물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행위와 기능, 즉 '프로그램(Program)'을 어떻게 조직하고 뒤섞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는 저서 '정신착란의 뉴욕(Delirious New York)'을 통해 밀집된 현대 도시의 혼돈과 거대함(Bigness)을 긍정하고, 서로 전혀 다른 기능들이 한 건물 안에서 충돌하며 빚어내는 새로운 에너지를 현대 건축의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시애틀 중앙 도서관: 교차 프로그램의 정수
렘 콜하스의 철학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작품은 2004년에 완공된 미국의 '시애틀 중앙 도서관(Seattle Central Library)'이다. 과거의 도서관이 엄숙하고 조용한 보관소였다면, 콜하스는 도서관을 정보가 활발하게 교환되는 거대한 사회적 거실로 재정의했다. 그는 나선형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책의 나선(Books Spiral)'이라는 독창적인 연속 동선을 고안하여, 방문객이 층을 이동하지 않고도 000번부터 999번까지의 십진분류법 도서를 자연스럽게 산책하듯 탐색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엇갈린 유리의 기하학적 형태 속에 공공 광장, 회의실, 열람실 등의 이질적인 프로그램들을 겹겹이 쌓아 올려, 지루할 틈 없는 공간적 경험과 시각적 개방감을 창출했다. 형태는 그저 내부의 복잡한 프로그램을 덮어주는 껍질에 불과하다는 그의 선언이 완벽하게 증명된 것이다.
리움미술관, 블랙 콘크리트가 뿜어내는 중력의 착시

한국에서는 서울 한남동의 리움미술관 아동교육문화센터를 통해 그의 묵직한 파격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마리오 보타의 붉은 벽돌과 장 누벨의 부식 스테인리스 스틸이 대지 위에 육중하게 내려앉아 있다면, 렘 콜하스는 거대한 '블랙 콘크리트(Black Concrete)' 상자를 대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띄워 올렸다. 검은빛을 띠는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Mass)가 얇은 기둥들에 의지해 공중에 부양해 있는 듯한 형태는 강렬한 시각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내부로 들어서면 블랙 박스를 관통하는 역동적인 에스컬레이터와 다양한 층위로 꺾이는 경사로가 등장하며, 관람객의 동선 그 자체가 역동적인 하나의 전시 프로그램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다.
도시의 혼돈을 수용하는 르 코르뷔지에적 효율성 (필자의 단상)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핵심 철학을 '효율성'이라고 생각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콜하스의 건축은 이 효율성이 현대 도시의 극단적인 복잡성 속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다. 필자가 최근 춘천 운교동의 팔호광장과 운교사거리 일대를 답사하며, 문을 닫은 가게가 문을 연 가게보다 많은 상권 쇠퇴 현상과 효자동, 후평동으로 이어지는 도시 조직의 문제점들을 분석한 적이 있다. 죽어가는 도시 공간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건물의 외관을 예쁘게 포장하는 도시 재생이 아니라, 콜하스처럼 내부의 프로그램을 파격적으로 재배치하고 기능을 충돌시켜 새로운 활력을 창출하는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렘 콜하스의 블랙 콘크리트와 공간 실험은, 복잡한 도시의 이면을 외면하지 않고 그 혼돈 자체를 건축의 재료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가장 현대적이고 치열한 건축적 응답이다.
참고자료 출처:
- 렘 콜하스 건축 철학 및 시애틀 중앙 도서관 (https://ko.wikipedia.org/wiki/렘_콜하스)
- 리움미술관 아동교육문화센터 건축 소개 (https://www.leeum.org/leeum/intro/architecture.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