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중심주의를 탈피한 몸의 건축
현대 사회는 스마트폰의 픽셀부터 거대한 디지털 광고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가 시각적으로 소비되는 '시각 중심주의(Oculocentrism)'의 시대다. 건축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많은 건축가들이 잡지나 소셜 미디어의 네모난 화면 속에서 어떻게 하면 건물의 형태가 더 화려하고 기하학적으로 눈에 띌 수 있을지만을 고민하며 스펙터클한 외관 경쟁에 몰두해 왔다. 그러나 인간이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결코 눈(Eye)이라는 단일 감각 기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발바닥에 닿는 돌의 서늘한 촉감, 좁은 통로를 지날 때 들려오는 발걸음의 메아리, 비 내리는 날 콘크리트 벽에서 피어오르는 습기의 냄새 등 온몸의 감각을 통해 공간의 '분위기(Atmosphere)'를 지각한다. 이처럼 시각적 형태주의를 맹렬히 거부하고 인간의 오감과 재료의 본질적인 물성에 집중하여 건축을 신체적 체험의 장으로 환원하려는 흐름을 '건축 현상학(Architectural Phenomenology)'이라 부른다. 그리고 스위스 알프스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평생을 은둔자처럼 작업하며, 이 현상학적 건축의 숭고한 정점을 찍은 장인이 바로 2009년 프리츠커상 수상자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다.
형태를 지우고 감각을 깨우다
페터 춤토르의 건축 철학은 건물의 외형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설계의 출발점을 건물이 지어질 대지의 역사, 재료가 지닌 특유의 온도와 냄새, 그리고 그곳에 머물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에 둔다. 그의 도면에는 과장된 곡선이나 하이테크적인 기계 설비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 돌, 물, 그리고 빛과 같은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재료들을 고도의 장인 정신으로 정밀하게 가공하여 서로 충돌시키고 조화롭게 배치한다. 춤토르에게 훌륭한 건축이란 형태를 뽐내는 조각품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빛의 미세한 산란을 담아내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증폭시키는 거대한 '감각의 공명 상자'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준다.

건축 현상학의 본질을 가장 경이로운 서사로 증명한 그의 대표작은 스위스 그라우뷘덴주의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발스 온천(Therme Vals, 현 7132 스파)'이다. 일반적인 온천 휴양지들이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건물 외벽 전체를 통유리로 덮으려 할 때, 페터 춤토르는 정반대의 선택을 내렸다. 그는 주변 채석장에서 캐낸 회녹색의 발스 규암(Vals Quartzite) 6만여 장을 마치 벽돌처럼 한 층 한 층 정교하게 쌓아 올려, 온천 건물을 알프스의 거대한 암반 그 자체로 만들어버렸다. 외부로 열린 시야를 닫아버리고 관람객을 동굴과 같은 육중한 돌의 심연 속으로 이끈 것이다.
발스 온천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은 종교적인 제의에 가깝다. 탈의실을 지나 어두컴컴한 미로 같은 돌벽 사이를 거닐면, 발바닥에는 규암의 서늘하고 거친 촉감이 전해지고 공기 중에는 짙은 미네랄의 냄새와 수증기가 폐부를 채운다. 춤토르는 천장의 거대한 돌 슬래브 사이에 미세한 틈새를 열어두어, 태양의 각도에 따라 예리한 빛의 줄기들이 수면 위로 떨어지며 파편처럼 부서지게 만들었다. 차가운 돌의 질감, 뜨거운 물의 온도, 실내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물의 파동 소리, 그리고 어둠을 가르는 가느다란 빛줄기. 이 모든 원초적인 감각들이 겹겹이 교차하는 발스 온천은 시각의 폭력을 차단하고 잊혀 있던 몸의 오감을 극한까지 일깨우는 완벽한 현상학적 텍스트다.

불이 남긴 냄새와 흔적, 브루더 클라우스 들판 예배당
발스 온천이 돌과 물의 교향곡이라면, 독일 메헤르니히의 허허벌판 농경지 한가운데 세워진 '브루더 클라우스 들판 예배당(Bruder Klaus Field Chapel)'은 불과 콘크리트, 그리고 냄새가 빚어낸 숭고한 침묵의 공간이다. 지역 농부들의 의뢰로 지어진 이 작고 투박한 예배당은 그 건축 과정 자체가 하나의 경건한 수행에 가깝다. 춤토르는 112그루의 소나무 몸통을 텐트 모양으로 세우고, 그 위에 마을 농부들과 함께 매일 조금씩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12미터 높이의 각진 오각기둥 형태를 완성했다.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은 뒤, 그는 내부의 소나무 거푸집을 뜯어내는 대신 3주 동안 불을 지펴 나무를 완전히 숯으로 태워버렸다.
결과물은 압도적이었다. 예배당 내부로 몸을 숙여 들어가면, 콘크리트 내벽에는 타버린 통나무의 수직적인 텍스처가 화석처럼 깊게 새겨져 있으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은은한 나무 타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지붕이 뚫려 있는 오큘러스(Oculus)를 통해서는 비와 눈이 그대로 예배당 바닥으로 쏟아지며, 벽면에 남겨진 수백 개의 작은 구멍(거푸집을 묶었던 핀 구멍)들에는 유리 구슬을 끼워 넣어 바깥의 빛이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영롱하게 맺히도록 유도했다. 춤토르는 불이 휩쓸고 간 소멸의 흔적 위에 빛과 비를 끌어들임으로써, 시골 들판의 작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인간과 우주가 감각적으로 조우하는 가장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성소로 탈바꿈시켰다.
소란한 디지털 시대, 침묵을 짓는 장인
오늘날 건축계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건물의 형태를 계산하고,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3D 공간 속에서 비물질적인 건물들을 사고파는 극단적인 비대면과 시각화의 시대로 내달리고 있다. 그러나 스위스 산골에서 침묵을 다듬는 장인 페터 춤토르의 철학은 이러한 거대한 디지털 흐름 앞에서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의 육체로 회귀할 것을 준엄하게 명령한다. 그에게 건축은 모니터 화면 속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하의 겨울날 문고리를 잡았을 때 느껴지는 쇳덩이의 차가움, 좁은 복도를 걸을 때 신발 밑창에서 전해지는 돌바닥의 거친 마찰음, 그리고 해 질 녘 벽돌을 붉게 물들이는 따뜻한 빛의 온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화려함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소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돌과 물, 그리고 빛의 속삭임으로 잊혀진 오감을 벼려내는 페터 춤토르의 묵직한 현상학적 건축은 인류가 결코 상실해서는 안 될 공간의 진정한 본질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참고자료 출처:
- 페터 춤토르 '건축을 생각하다(Thinking Architecture)' 철학 선언문
- 발스 온천(7132 Therme) 및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 건축 설계 개요 및 시공 방식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