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뼈대와 내장을 드러내다, 건축의 파격적 선언
수천 년의 건축 역사에서 구조를 튼튼하게 지탱하는 뼈대나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배관들은 철저히 감춰져야 할 대상이었다. 건물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들이지만, 시각적으로는 투박하고 흉물스럽다는 이유로 화려한 대리석이나 벽돌 마감재 뒤에 조용히 은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고 반항적인 건축가들은 이러한 건축의 오랜 금기를 단숨에 깨부수었다. 우주선, 항공기, 거대한 정유 공장의 기계 설비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은 현대 산업 사회의 눈부신 기술력을 건축의 전면에 당당히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하이테크 건축(High-Tech Architecture)'의 탄생이다. 이들은 숨겨져 있던 건물의 내장(설비)과 뼈대(구조)를 과감하게 밖으로 뒤집어 까는 극단적인 시각적 혁명을 일으키며, 기계가 가진 정밀함과 공학적인 효율성을 건축 미학의 새로운 기준점으로 승화시켰다
파리를 발칵 뒤집은 기계 건축, 퐁피두 센터
하이테크 건축이 세상에 던진 가장 충격적인 폭탄은 1977년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들어선 '조르주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Pompidou)'였다. 렌조 피아노(Renzo Piano)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가 설계한 이 거대한 문화 복합 시설은, 고풍스러운 파리의 전통적인 석조 건물들 사이에서 마치 미완성된 거대한 공장 구조물처럼 보였다.
이들은 건물의 뼈대인 거대한 강철 트러스를 외벽 밖으로 완전히 노출시켰고,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환기 파이프, 상하수도관 등 모든 설비 배관을 건물 외부로 빼내어 원색의 페인트를 칠해버렸다. 전기는 노란색, 수도는 초록색, 공조 시설은 파란색, 사람의 이동 통로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배관들은 그 자체로 건물의 가장 화려하고 파격적인 장식이 되었다. 초기 파리 시민들은 "파리 한복판에 내장을 다 드러낸 괴물이 나타났다"며 맹렬히 비난하고 철거를 주장했지만, 이 건물은 머지않아 현대 건축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가장 위대한 걸작이자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궁극의 공간적 자유, 유연성을 획득하다
퐁피두 센터를 비롯한 하이테크 건축가들이 설비와 기둥을 건물 밖으로 몰아낸 데에는 단순한 시각적 도발을 넘어선 철저한 '기능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기둥과 거대한 배관 등 공간을 차지하는 거추장스러운 요소들이 모두 바깥으로 빠져나가면서, 건물 내부에는 하중을 받는 내력벽이나 기둥이 단 하나도 없는 광활하고 유연한 대공간(Free Plan)이 탄생한 것이다.
미술관이나 도서관으로 쓰이는 내부는 전시 목적이나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가벽을 자유롭게 세우고 허물며 공간을 마음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얻었다. 하이테크 건축의 또 다른 거장인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설계한 홍콩의 HSBC 본사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거대한 강철 교량처럼 구조체를 외부에 매달아 내부 공간의 자유도를 극대화했다. 이들에게 첨단 기술의 도입과 설비의 노출은 곧 건물 내부 공간의 '효율성'과 '가변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이었다.
친환경 에코-테크로 진화하는 현대의 하이테크
초기의 하이테크 건축이 기계의 차가운 금속성과 과장된 설비 자체를 찬양하는 낭만적인 기술주의에 집중했다면, 오늘날의 하이테크 건축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친환경 하이테크(Eco-Tech)'로 진화하고 있다. 이제 건물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센서와 컴퓨터가 결합된 인공지능 외장재(스마트 스킨)가 전면에 도입되고 있다. 햇빛의 양에 따라 창문의 루버(Louver)가 스스로 각도를 조절하고, 외벽이 주변 온도에 반응해 열을 흡수하거나 반사한다. 장 누벨(Jean Nouvel)의 파리 아랍 세계 연구소(Institut du Monde Arabe)에서 볼 수 있는 카메라 조리개 형태의 자동 개폐 창문이나, 빗물과 풍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는 현대의 초고층 하이테크 빌딩들은 건축물이 단순한 기계를 넘어 주변 환경과 스스로 호흡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정직한 장식에 대한 찬사 (필자의 단상)
필자는 과거부터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건축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을 '효율성'이라고 굳게 믿어 왔다. 그리고 하이테크 건축이야말로 그 효율성의 미학을 기계 공학의 언어로 가장 극단적이고 솔직하게 풀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대리석이나 나무껍질 같은 가짜 치장으로 건물의 민낯을 그럴싸하게 숨기는 대신, 하이테크 건축은 건물이 살아 숨 쉬기 위해 작동하는 피와 뼈, 그리고 장기를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기계적이고 차가워 보일지 모르나, 동시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가장 정직한 형태의 장식일 것이다. 도시의 화려한 스카이라인 속에서 배관과 철골을 고스란히 드러낸 하이테크 건축물 앞에 서면, 인류가 쌓아 올린 산업 사회의 눈부신 기술력에 대한 찬가와 함께 건물의 본질적인 기능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가식을 벗어던지고 기계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이 솔직한 건축물들은, 여전히 현대 건축이 나아가야 할 혁신의 가장 날카로운 최전선에 서 있다.
※ 사진 및 참고자료 출처:
- 하이테크 건축 양식의 역사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하이테크_건축
- 조르주 퐁피두 센터 건축 개요: https://ko.wikipedia.org/wiki/조르주_퐁피두_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