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도권 교육에 반기를 든 독립 학교
영국 런던 중심부 베드퍼드 스퀘어(Bedford Square)에 자리한 '에이에이 스쿨(AA School, 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은 전 세계 건축학도들이 가장 열망하는 꿈의 무대다. 자하 하디드, 렘 콜하스, 리처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 등 현대 건축을 이끄는 거장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여느 명문 대학의 건축학과와 달리 정규 종합대학에 속하지 않은 독립된 건축 전문 학교인 이곳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서양 건축의 아방가르드(전위적 예술)를 이끄는 거대한 실험실 역할을 해왔다.
1847년, 두 명의 젊은 건축가 지망생이었던 로버트 커(Robert Kerr)와 찰스 그레이(Charles Grey)는 당시 도제식(Apprenticeship)으로 이루어지던 낡고 권위적인 영국의 건축 교육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스승의 잔심부름을 하며 건축을 배우는 구시대적 방식을 거부하고, 학생들 스스로가 주도하여 건축을 논하고 배우는 독립적인 건축 단체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AA스쿨의 시작이다. 태생부터 주류 제도권 교육에 대한 '반항'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1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가나 대학 재단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운영 체제를 고집해 왔다. 학위 장사나 학계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가장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형태의 건축 실험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 독립성에 있다.
유닛 시스템, 경쟁과 독창성의 용광로
AA스쿨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 경쟁력은 '유닛 시스템(Unit System)'이라 불리는 독특한 스튜디오 수업 방식에 있다. 일반적인 대학처럼 정해진 전공 필수 과목이나 획일화된 커리큘럼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실무 건축가나 이론가들이 튜터(Tutor)가 되어 자신만의 도발적이고 구체적인 연구 주제(유닛)를 내건다.
학생들은 각 유닛의 주제를 꼼꼼히 살펴본 뒤 자신의 건축적 성향과 가장 잘 맞는 유닛을 스스로 선택해 1년 동안 튜터와 함께 치열하게 토론하고 프로젝트를 발전시킨다. 이 과정은 철저한 토론과 무한 경쟁 체제로 이루어진다. 교수와 학생의 수직적인 지시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맹렬히 비판하고 파괴하며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내는 지적 용광로인 셈이다. 이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단순히 건물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건축적 가치관을 방어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투쟁의 방식을 가르친다.
종이 위의 건축, 아키그램과 아방가르드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AA스쿨은 당장 실현 가능한 현실의 건축에만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 문제와 미래의 비전을 담은 '종이 위의 건축(Paper Architecture)'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1960년대 등장해 걷어다니는 도시(Walking City)나 플러그인 시티(Plug-in City)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세계 건축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아방가르드 그룹 '아키그램(Archigram)' 역시 AA스쿨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교육을 이끌었다.
비현실적이고 중력을 거스르는 형태 때문에 평생 도면만 그릴 것이라 조롱받았던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해체주의적 상상력이나, 건물의 외관보다 프로그램 자체를 뒤섞어버린 렘 콜하스(Rem Koolhaas)의 파격적인 논문들 역시 AA스쿨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결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학교는 건물이 무조건 땅 위에 서야 한다는 공학적이고 물리적인 강박을 지우고, 건축을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예술의 영역으로 무한히 확장했다.
건축은 짓는 것 이상이라는 철학적 선언 (필자의 단상)
필자는 AA스쿨의 독창적인 교육 방식을 접하며, 오늘날 우리가 정의하는 '건축'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깊이 사유하게 된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주류 건축 교육이 여전히 법규와 용적률, 그리고 공학적인 '시공 가능성'에 얽매여 구조적으로 안전하고 반듯한 건물을 '잘 짓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AA스쿨은 건축을 단순히 비바람을 막고 자본을 축적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건축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구조에 질문을 던지고, 공간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고도의 지적이며 철학적인 행위다.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아방가르드 정신, 그리고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 상상력의 끝을 밀어붙이게 만드는 유닛 시스템이야말로 오늘날의 스타 건축가들을 배출한 진정한 근원이다. 실용성과 경제성이라는 이름 아래 상상력을 거세당하고 있는 현대의 수많은 건축학도와 도시인들에게, 기성의 규칙을 깨부수며 시대를 선도해 온 런던 AA스쿨의 거침없는 실험 정신은 실로 묵직한 영감과 뼈아픈 일침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 참고자료 출처:
- 영국 건축협회 건축학교(AA School) 공식 웹사이트: https://www.aaschool.ac.kr/ (영문)
- 아키그램 및 AA스쿨의 건축사적 의의: https://ko.wikipedia.org/wiki/영국_건축협회_건축학교